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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민 감성 에세이
9월의 첫날며칠째 오락가락하던 빗줄기는오늘도 계속되었다.분명 가을을 불러오는 비다.아니, 여름 내 달궈진 도시를정리하는 비인지도 모른다.서늘한 공기와 바람은이미 가을 문턱을 넘어왔는데,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여름은헤어짐이 아쉬운지미적거리며 버티고 있다.어젯밤 귀뚜라미 울음이그렇게 정겹게 들릴 수가 없었다.아직은 긴 낮이 버티고 있지만머지않아 밤에게 잠식당할 것이다.문득 지난 여름을 더듬어 본다.추억은 1도 없다.아무 일도 없었던 여름.그저 덥고 지루하고짜증만 나는 하루하루였다이제 편지를 쓴다가을에게.
가을로 가는 기찻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영수는 창밖의 비를 바라보았다. 여름의 막바지, 못 다 뿌린 비가 남았을까? 가을을 시샘하는 여름의 심술일까?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딱히 답을 구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비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내리고 있었다. 영수가 무슨 생각을 하든,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내든 상관없다는 듯, 소리 없이 쉼 없이 내리고 있었다. 일찍 잠에서 깬 영수는 컴퓨터 앞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의 압축본을 보고 있다. 아침은 사과 하나와 식빵 한 쪽, 우유 반잔과 고구마와 바나나 하나씩. 영수는 캡슐 커피를 내려 홀짝이며 비오는 창을 무심히 바라본다. 11시쯤 전화의 진동음이 울렸으나 도움 안 되는 쓸데없는 전화였다. "네 네 네 알겠습니다. 다음에 연락 드릴께요"..
1막 — 탈출장면 1. 지하 실험실새벽 2시대전 외곽 국책연구단지. 낡은 건물 지하 깊숙한 곳.형광등 몇 개만 살아 있는 실험실 안에는 기계음 대신 이상할 정도의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원래라면 초저온 냉각장치의 굉음이 공간을 가득 메워야 했다.영하 273도.인류는 지금까지 그 극한의 온도 속에서만 양자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하지만 지금 실험실 온도계는 조용히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23°C. 상온.모니터 위 큐비트 안정화 그래프는 미동조차 없었다.완벽한 고정.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젊은 연구원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공입니다.”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그 순간 모두가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이 기술은 단순한 과학의 진보가 아니었다. 세상의 질서를 뒤집을 무기였다...
8월 말인데도 건물 벽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에어컨 실외기들이 윙윙거리며 뜨거운 바람을 뿜어낸다.그 열기에 짜증을 내면서도 정작 나는 에어컨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이것 역시 인간이 가진 역설일까.책장 한구석에 눈에 뜨인 '데미안'을 뒤적인다. 책 속의 싱클레어를 바라보며 나의 어린 시절과 청춘을 함께 떠올린다.어린 싱클레어는 밝고 안전한 세계에서 자라다가 어둡고 낯선 세계와 마주한다. 그리고 데미안을 통해 세상이 선과 악으로 단순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그런데 책을 덮고 나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나는 과연 나 자신을 찾았는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 자체가 어이없다.솔직히 말하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돌아보면 나는 주어진 환..
끈적한 여름밤.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저승사자의 부름인가 오토바이 소리에 잠은 멀리 갔다.창밖은 인적 없고 가로등 불빛 아래 하루살이들만 분주하다.달도 구름도 모호한 무경계.선풍기 낮은 음이 먼 하늘 비행기 소리처럼 들린다.여명은 아직, 세 시 반.서광에 달릴 고속도로, 터널 끝을 향한 질주와 하프시코드의 쨍쨍한 울림.긴장감이 조여온다.오늘도 불면의 밤.
1. 균열평양의 밤은 칼날처럼 차가웠다.주석궁 깊은 곳, 연일 이어지는 유혈 숙청과 경제난에 따른 민심 폭발 보고서 앞에 앉아 있던 최고지도자는 과도한 스트레스와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뇌출혈로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곁을 지키던 경호원이 다급히 무전을 날렸지만, 그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지도자의 혼절은 권력의 긴 사슬을 일순간에 끊어버렸다.권력의 정점이 침묵하자, 그 아래 뒤엉켜 있던 야심과 원한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평양 시내에서는 이미 시민들과 손을 잡은 군부 실력자들이 보위성을 제압하고 방송국을 점거한 상태였다. 총성은 짧았고, 저항은 더 짧았다. 오랫동안 감시당해 온 사람들의 분노는 생각보다 훨씬 조직적이었다.권력의 중심이 요동치자,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정예 사단들이 수도를 보위한..
더운데 쉬어가자고 토요일 아침을 음악과 함께 열었다.창 밖은 비가 올듯 흐린데 끈적한 공기는 눈 앞에 이글거리는 태양의 아지랑이가 보이는 것 같았다.태양하면 떠오르는 꽃 해바라기.태양만 바라본다는 꽃. 이쯤에 이르자 영화 '해바라기'가 생각났고 해바라기 꽃 밭이 눈 앞에 펼쳐졌다.1970년에 개봉했으나 국내에는 1982년에 상영되었고 내가 대학시절이었다.해바라기 ost를 찾아 나의 공간에 띄웠다.오래전 영화의 기억은 가물거렸지만 여주인공이 당대의 유명한 섹시스타로 지중해의 미녀로 불리웠던 '소피아 로렌'이었기에 이 배우를 스크린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다 봤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실제 남자 주인공은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였는데, 이상하게 내 기억 속엔 늘 '안소니 퀸'이 자리잡고 있다. 평생을..
떨어지고 지는 것은 꽃만이 아니다구름 속 비도 눈도 때가 되면 떨어지고 녹아든다꽃잎은 화려한 순간을 빗물은 슬픔의 흔적을떨어지지도 시들지도 웃음 뒤의 감춘 비애도 없다 나에겐꽃에겐 떨어질 나무가 있었고 비에겐 떨어질 구름이 있었다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것도 만들거나 가지지 못했다 나에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