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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민 감성 에세이
황혼의 파라솔현민은 한강 공원의 한적한 벤치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끈적이던 더위도 몇 일 전부터 누그러져 강 바람이 비교적 시원하게 느껴졌다. 해가 한강의 서쪽 끝을 물들이고 있었지만 그 화려함이 서글퍼 보이는 듯 고개를 돌려 다시 흐르는 물을 쳐다봤다. 서쪽에서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걸어오는 비교적 젊어 보이는 남자. 햇빛을 등진 얼굴은 검게 실루엣으로 형체만 보였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땅을 쳐다보며 터벅터벅 현민 앞을 무심히 지나쳐 강을 거슬러 걸어가니 이번엔 햇빛이 그의 등을 수놓고 있었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빛이 주는 느낌이 이렇게 다르구나 하고 문득 생각했지만 이내 머리는 텅 비었다. 다가오는 추석 명절을 생각하니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허무하..
[새벽 단상]정말 오랜만에 얇은 이불 안이 포근함을 느꼈다 자다 깨다의 불편함은 변함없지만 창문은 아주 살짝만 열리고 실내 공기도 뽀송하다. 한 여름에도 수면 양말은 꼭 신고 잔다, 발이 시려워. 계절은 돌고 돌지만 내 몸은 항상 겨울이고, 나의 시간은 서쪽으로만 향한다. 길어지는 밤의 푸근한 속에서도 나의 삶은 단축되어 간다. 새벽5시27분 시계바늘은 하나로 겹쳐 시간이 멈춘 듯 서 있으나 나의 밤을 밀어내며 앞으로 가고 있다.
거목을 바라보는 눈요즘 5.18사태와 관련해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어 논쟁이 심화되었고,또 이것이 동학혁명까지 들먹이는 상황에 이르렀다.이런저런 기사와 영상들을 보다가 역사의 회한길을 더듬어 보게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TV 화면 속 조선시대는 참으로 답답한 세상이었다. 궁궐 구석마다 모여 앉아 서로를 헐뜯는 당파싸움, 민초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는 무능한 왕과 탐관오리들과 궁중의 여성들의 쓸데없는 권력싸움. 역사를 다룬 드라마를 볼 때마다 밀려오는 안타까움? 아니 안타깝다기 보다 화가 나서 답답함에 채널을 돌려버리기 일쑤였다. ‘어찌하여 우리 역사는 이토록 무기력하고 비운으로 가득했을까’ 하는 어린 날의 자조(自嘲)는 오랫동안 가슴 한구석에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세상을 조금 더 깊이 바..
여름을 보내줘야 할 핑계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초록을 가득 채웠던 나뭇잎들이 소임을 다하고 옷을 갈아입으려 한다.초록의 옷을 벗고 화려한 축제의 옷을 잠시 걸친 채 퇴장을 준비한다.홈쇼핑에서는 벌써 가을과 겨울옷을 소개한다.자연보다 사람이 계절을 더 서두르는 듯하다.어느새 나 또한 아침의 서늘한 공기에 긴 셔츠를 꺼내 입는다.여름 내내 손도 대지 않던 옷인데, 계절은 말없이 다가와 가장 사소한 일상부터 바꾸어 놓는다. 하루의 대장 노릇을 했던 긴 낮도 밤의 반란 앞에 서서히 자리를 내어줄 채비를 하고 있다.밤은 조금씩 길어지며 뜨거웠던 여름의 열기를 잠재우고, 시끄러웠던 낮의 불협화음을 귀뚜라미의 서정적인 선율로 바꾸어 지휘한다.새벽 공기와 신선한 바람은 가을의 예고편처럼 찾아오고 창문을 노크하는 바람..
9월의 첫날며칠째 오락가락하던 빗줄기는오늘도 계속되었다.분명 가을을 불러오는 비다.아니, 여름 내 달궈진 도시를정리하는 비인지도 모른다.서늘한 공기와 바람은이미 가을 문턱을 넘어왔는데,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여름은헤어짐이 아쉬운지미적거리며 버티고 있다.어젯밤 귀뚜라미 울음이그렇게 정겹게 들릴 수가 없었다.아직은 긴 낮이 버티고 있지만머지않아 밤에게 잠식당할 것이다.문득 지난 여름을 더듬어 본다.추억은 1도 없다.아무 일도 없었던 여름.그저 덥고 지루하고짜증만 나는 하루하루였다이제 편지를 쓴다가을에게.
가을로 가는 기찻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영수는 창밖의 비를 바라보았다. 여름의 막바지, 못 다 뿌린 비가 남았을까? 가을을 시샘하는 여름의 심술일까?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딱히 답을 구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비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내리고 있었다. 영수가 무슨 생각을 하든,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내든 상관없다는 듯, 소리 없이 쉼 없이 내리고 있었다. 일찍 잠에서 깬 영수는 컴퓨터 앞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의 압축본을 보고 있다. 아침은 사과 하나와 식빵 한 쪽, 우유 반잔과 고구마와 바나나 하나씩. 영수는 캡슐 커피를 내려 홀짝이며 비오는 창을 무심히 바라본다. 11시쯤 전화의 진동음이 울렸으나 도움 안 되는 쓸데없는 전화였다. "네 네 네 알겠습니다. 다음에 연락 드릴께요"..
1막 — 탈출장면 1. 지하 실험실새벽 2시대전 외곽 국책연구단지. 낡은 건물 지하 깊숙한 곳.형광등 몇 개만 살아 있는 실험실 안에는 기계음 대신 이상할 정도의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원래라면 초저온 냉각장치의 굉음이 공간을 가득 메워야 했다.영하 273도.인류는 지금까지 그 극한의 온도 속에서만 양자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하지만 지금 실험실 온도계는 조용히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23°C. 상온.모니터 위 큐비트 안정화 그래프는 미동조차 없었다.완벽한 고정.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젊은 연구원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공입니다.”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그 순간 모두가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이 기술은 단순한 과학의 진보가 아니었다. 세상의 질서를 뒤집을 무기였다...
8월 말인데도 건물 벽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에어컨 실외기들이 윙윙거리며 뜨거운 바람을 뿜어낸다.그 열기에 짜증을 내면서도 정작 나는 에어컨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이것 역시 인간이 가진 역설일까.책장 한구석에 눈에 뜨인 '데미안'을 뒤적인다. 책 속의 싱클레어를 바라보며 나의 어린 시절과 청춘을 함께 떠올린다.어린 싱클레어는 밝고 안전한 세계에서 자라다가 어둡고 낯선 세계와 마주한다. 그리고 데미안을 통해 세상이 선과 악으로 단순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그런데 책을 덮고 나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나는 과연 나 자신을 찾았는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 자체가 어이없다.솔직히 말하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돌아보면 나는 주어진 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