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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민 감성 에세이
8월 말인데도 건물 벽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에어컨 실외기들이 윙윙거리며 뜨거운 바람을 뿜어낸다.그 열기에 짜증을 내면서도 정작 나는 에어컨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이것 역시 인간이 가진 역설일까.책장 한구석에 눈에 뜨인 '데미안'을 뒤적인다. 책 속의 싱클레어를 바라보며 나의 어린 시절과 청춘을 함께 떠올린다.어린 싱클레어는 밝고 안전한 세계에서 자라다가 어둡고 낯선 세계와 마주한다. 그리고 데미안을 통해 세상이 선과 악으로 단순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그런데 책을 덮고 나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나는 과연 나 자신을 찾았는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 자체가 어이없다.솔직히 말하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돌아보면 나는 주어진 환..
끈적한 여름밤.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저승사자의 부름인가 오토바이 소리에 잠은 멀리 갔다.창밖은 인적 없고 가로등 불빛 아래 하루살이들만 분주하다.달도 구름도 모호한 무경계.선풍기 낮은 음이 먼 하늘 비행기 소리처럼 들린다.여명은 아직, 세 시 반.서광에 달릴 고속도로, 터널 끝을 향한 질주와 하프시코드의 쨍쨍한 울림.긴장감이 조여온다.오늘도 불면의 밤.
1. 균열평양의 밤은 칼날처럼 차가웠다.주석궁 깊은 곳, 연일 이어지는 유혈 숙청과 경제난에 따른 민심 폭발 보고서 앞에 앉아 있던 최고지도자는 과도한 스트레스와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뇌출혈로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곁을 지키던 경호원이 다급히 무전을 날렸지만, 그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지도자의 혼절은 권력의 긴 사슬을 일순간에 끊어버렸다.권력의 정점이 침묵하자, 그 아래 뒤엉켜 있던 야심과 원한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평양 시내에서는 이미 시민들과 손을 잡은 군부 실력자들이 보위성을 제압하고 방송국을 점거한 상태였다. 총성은 짧았고, 저항은 더 짧았다. 오랫동안 감시당해 온 사람들의 분노는 생각보다 훨씬 조직적이었다.권력의 중심이 요동치자,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정예 사단들이 수도를 보위한..
더운데 쉬어가자고 토요일 아침을 음악과 함께 열었다.창 밖은 비가 올듯 흐린데 끈적한 공기는 눈 앞에 이글거리는 태양의 아지랑이가 보이는 것 같았다.태양하면 떠오르는 꽃 해바라기.태양만 바라본다는 꽃. 이쯤에 이르자 영화 '해바라기'가 생각났고 해바라기 꽃 밭이 눈 앞에 펼쳐졌다.1970년에 개봉했으나 국내에는 1982년에 상영되었고 내가 대학시절이었다.해바라기 ost를 찾아 나의 공간에 띄웠다.오래전 영화의 기억은 가물거렸지만 여주인공이 당대의 유명한 섹시스타로 지중해의 미녀로 불리웠던 '소피아 로렌'이었기에 이 배우를 스크린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다 봤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실제 남자 주인공은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였는데, 이상하게 내 기억 속엔 늘 '안소니 퀸'이 자리잡고 있다. 평생을..
떨어지고 지는 것은 꽃만이 아니다구름 속 비도 눈도 때가 되면 떨어지고 녹아든다꽃잎은 화려한 순간을 빗물은 슬픔의 흔적을떨어지지도 시들지도 웃음 뒤의 감춘 비애도 없다 나에겐꽃에겐 떨어질 나무가 있었고 비에겐 떨어질 구름이 있었다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것도 만들거나 가지지 못했다 나에겐.
하늘을 담고 나무와 구름 나는 새까지 상영되는 은막.호수의 가슴에 돌을 던지면 파문의 스크린은 작은 소리까지 연주한다.계절마다 다른 영상 날리는 꽃잎 호수 건반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춤사위파스텔로 그림 그리고 차가운 질감도 나눠준다.내 마음의 스크린 작은 호수 자연을 담고쉼과 평안을 주는 나의 안식처.
아울리스의 제단과 한강의 기적평소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 ‘이혜성의 1% 북클럽’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해설 편을 보게 되었다. 이혜성 아나운서는 트로이로 향하는 순풍을 얻기 위해 자신의 친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그리스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비극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 대목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등장하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 개념과 연결 지어 설명했다. 이혜성은 공리주의의 딜레마, 즉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이 정말 정의로운가라는 질문과 연결 지은 것이다.그녀의 해설을 들으며 철학적 질문에 몰입하던 순간, 내 머릿속에는 뜻밖에도 우리나라의 1960~70년대,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 겹쳐졌다. 물론 아가멤논과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은 그..
[8월 18일 아침의 기분 ] 어젯저녁 잠시 뿌린 비가기세등등 폭염과 싸워 이겼다.10시를 앞둔 시간 견딜 만한 아침.참매미와 말매미는 번갈아 합창을 즐긴다. 다시 불어올 열풍의 경고라도 하듯.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헤어진견우와 직녀는 지금쯤 어떤 마음일까.일 년을 기다려 단 하루 만나는칠석을 하루 앞 둔 아침.까마귀와 까치가 놓아준 오작교 위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은 설렐까,기다림의 무게로 떨리고 있을까.예전에는 8월15일 무렵이면여름에서 해방되는 느낌이었고가을의 문턱을 넘는 듯했다.지금은 9월에도매미 울음이 극성이다. 길어진 여름속에서 계절의 경계는 흐려지고 환경이 변한 세상에서매미들은 무엇을 노래하는가. 더 길어진 여름이 마냥 좋아기쁜 마음으로 우는 것일까.끝내 오고야 말 여름의 작별이 아쉬워..
봉선화가 다시 웃는 날태풍이 비켜가고 또 비켜갔다.다행이 동해쪽으로 밀고 온 태풍 '찬홈'이 한반도를 뒤덮고 있던 열돔을 벗겨냈다. 시원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숨 막히던 불가마 같은 더위는 한풀 꺾였다. 밤공기에는 오랜만에 여유가 묻어났다.바짝 마른 울 밑에 처량하게 쳐져있던 봉선화도 몇 방울의 비에 환한 웃음을 되찾았다.짜증나던 매미의 울음 소리도 오늘 만큼은 환희의 합창의 울림으로 들린다. 여름도 막바지로 치닫는 오늘은 8월 15일, 광복절이다.어린 시절 광복절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았고 3.1절 유관순 누나의 노래도 불렀다.17층 아파트 베란다에 내 걸었던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면 날아갔지만 그 후 태극기를 마련하지 않았다. 후회가 밀려온다.역사는 참 아이러니하다.한때 총칼을 앞세워..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은 시작된다금요일이면 라디오 클래식 음악방송에서 특정한 작곡가나 음악, 그리고 그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코너를 즐겨 듣는다.오늘 방송은 핀란드의 국민 음악가 시벨리우스의 삶과 곡을 중심으로 해설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익숙하면서도 웅장한 선율, 가 흘러나왔다.교향시 는 1899년 제정 러시아의 강압적인 언론 탄압과 지배에 저항하고, 핀란드 민족의 독립심과 단결을 고취하기 위해 비밀리에 작곡된 연극 부속 음악에서 출발한 곡이다.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하고, 때로는 투쟁의 의지를 뿜어내는 강력한 음들이 민족주의 정신과 어우러져 가슴을 뭉클하게 울렸다.음악에 담긴 역사적 배경을 곱씹다 보니 생각은 자연스럽게 북유럽을 넘어 우리나라의 역사로 향했다. 외세의 압제에 저항하고..
